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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ARBY

우일각 주변 관광지

전등사


1. 개요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정족산 근처에 있는 사찰.
강화도 남부 정족산 근처에 있는 사찰로 원래는 경기도 사찰이었으나 1995년 강화도가 인천광역시로 편입하게 된 후로는 인천광역시 사찰에 속해있다.


2. 역사

서기 381년 고구려 소수림왕 시절 아도화상이라는 승려에 의해서 창건되었고 고려왕조 때 수축하였다가 광해군때 화재로 소실된것을 다시 지었고 일제강점기 때 중수된 적이 있다.
고려시대때부터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사찰로서 중하게 여겼고 충렬왕의 왕비[1]였던 정화궁주가 절에 대장경과 함께 옥으로 만든 법등을 기증하면서 진종사(眞宗寺)라는 절 이름을 전등사(傳燈寺)로 바꾸게 되었다.
1605년과 1614년 큰 화재로 타버린것을 재건하여 1621년에야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1678년 숙종4년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게 하며 왕실의 보호를 받게 되었고 1719년부터는 주지승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임명하여 우대하였다.
1726년 영조2년 영조가 직접 전등사에 와서 취향당의 제액을 쓰고 1749년 중수불사重修佛事에는 목재를 시주하여 이때 지금의 대조루對潮樓의 모습으로 지었다.
1909년 보관중이던 실록을 서울로 옮겨 사고로서의 지위를 잃었으나 강화와 개성의 사찰을 관리하는 본산으로 승격되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피해를 보기도 하였는데 그 당시 프랑스군으로부터 불상과 법전 등 문화재가 약탈당하기도 하였다. 특히 이곳이 관군과 프랑스군의 교전지였다. 대웅전에 들어가 보면 얼핏 낙서처럼 보이는 묵서(墨書)들이 곳곳에 적혀 있는데, 그 하나하나가 병인양요 당시 참전했던 조선군 병사들의 이름이다. 프랑스군과의 교전을 앞두고 전쟁에서 이기고 또 무사히 살아 돌아오기를 빌면서 병사들이 대웅전 불단이며 기둥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고.


3. 은행나무 설화

때는 숭유억불 정책을 펼치던 조선시대, 전등사도 예외없이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관리들과 토호들의 토색질이 심해서 젊은 스님들은 강화성을 쌓는 데 사역을 나가고, 늙은 스님들은 종이를 만들어 바쳐야 했다. 거기에 더해 전등사에 있는 2그루 은행나무로 인해 매년 조정의 은행알셔틀 역할을 해야만 했는데, 그마저도 싹 다 털어 진상으로 바치고 나면 남는 게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스님들은 이것 또한 수행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관가에서 "조정에 진상할 전등사 은행알의 양을 크게 늘리겠다"며 20가마니를 요구했다. 안그래도 은행알을 있는 대로 다 털어도 10가마니밖에 안 될 판에 20가마니를 바치라니,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 많은 은행알을 구해서 바칠 수 있을지 막막해서 전등사 안은 난리가 났다. 조정에 상소를 올려도 씨도 안 먹힐 게 뻔하고, 그렇다고 탁발해서 모자란 양을 보충하자니 "좋은 은행은 승려들이 다 먹고 탁발한 은행들만 진상했다"고 트집잡힐 게 뻔하니, 이래저래 답이 없는 상황이었다. 고심 끝에 신통력이 있는 백련사의 추송 스님을 불러와서 문제를 해결하기로 한다.
추송 스님이 전등사에 도착하자, 전등사 승려들은 은행나무 아래에 단을 쌓아두고 3일기도를 올릴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드디어 3일기도가 시작되었는데, 전등사 안은 소문을 듣고 구경을 하러 온 강화도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어느샌가 관속 몇 명이 소문을 듣고 나타나서 구경꾼들의 틈에 끼다가, 그 중 한 사람이 "설마 공물 셔틀 하기 싫다고 저주 퍼붓는 거 아니냐"고 노스님에게 시비를 걸었다. 스님은 "어허, 어찌 그런 무엄한 말을! 상감께 진상할 은행이 곱절로 열리게 기도하는 것이오."하고 답했는데 그 관속이 비웃으며 "하하하핳ㅎ 말도 안 되는 소리 ㅋㅋ 그런다고 은행이 더 열릴 것 같은가? 참 웃기는군 하하핳" 하자마자 갑자기 "악" 소리를 내면서 얼굴을 감싸쥐고 땅바닥에 나자빠졌다. 얼마 후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니, 그는 한쪽 눈이 팅팅 뿔어 실명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 소문이 퍼지자 구경꾼이 더 모여들었다.
드디어 마지막 3일째, 기도가 거의 끝나자 목탁과 바라 소리가 일제히 멈추고 염불 소리도 멎어 전등사에 적막이 흘렀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추송선사가 은행나무를 향해 "오늘 3일기도를 마치며 이 은행나무 2그루가 100년이 지나도 1000년이 지나도 영원히 열매 단 한 알도 맺지 아니하기를 축원하나이다."고 낭랑한 목소리로 기도를 끝맺었다. 이를 듣고 있던 승려들과 구경꾼들은 "어 이거 뭥미? 은행을 곱절로 열리게 하는 거 아니었나?"고 어리둥절해 하는데 별안간 하늘이 어두워지고 요란한 천둥번개와 함께 세찬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며 은행나무에서 은행이 우수수 떨어졌다. 시간이 지나 비바람이 그치고 하늘이 개자 은행나무 쪽을 보니 추송 선사와 노승(老僧), 동승(童僧)은 온데간데없이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 날 이후 은행나무 2그루는 은행을 맺지 않게 되었고 관가의 탄압도 없어졌다. 하긴 진상으로 바칠 은행알이 아예 한 알도 안 열리게 되어버려서 먹고 죽을래도 없는 상황이니. 그리고 오늘날도 은행을 맺지 않고 있는 은행나무들은 노승나무와 동승나무로 불린다.


4, 여담

특이하게 중국 종을 가지고 있는데 보물 제393호로 철로 되어 있다. 보물로 지정된 종들 중에서는 유일한 중국 종이다. 원래는 중국 허난 성 백암산 숭명사의 종이었고[2] 해방 후 인천의 부평 군기창에서 발견하여 전등사로 옮겨졌다. 어떻게 한국으로 오게 됐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배를 통해 실어날랐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데, 일제강점기 말에 쇠붙이를 강제 수탈하던 때에 중국에서 반입한 것이 낙오되어 인천에 남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증언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말 당시 전등사의 원래 범종이 공출당했고, 해방이 되자 주지스님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천항구를 뒤지고 다녔는데 이 때 누군가 "부평 군기창 뒷마당에 종이 하나 있더라"고 알려주었다고 한다. 물론 원래의 범종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주인없는 채로 군기창[3]에 버려져 있으면 곧 녹여져 무기가 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가져왔다고 한다.
보물 178호 대웅전에는 보물 1785호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이 있고 좌상의 위에 극락조와 용등을 장식한 닫집이 화려하다. 건물바깥 추녀의 네 귀퉁이의 나부상(裸婦像)이 유명한데, 광해군시절 화재로 소실된 대웅전을 재건축하던 목수가 절 아래의 주막 주모와 눈이 맞아 돈을 맡겨두었으나 주모가 돈을 들고 튀었고, 이에 목수가 주모는 영원히 무거운 대웅전 지붕을 떠받치면서 속죄하라, 다른 사람들은 이를 보고 여색을 경계하라는 뜻에서 만들어넣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관련 기사 네귀퉁이에 각각 처마를 떠받들고 있는데 웃는표정과 우는표정이 있고 그중 하나는 두손이 아닌 한손만 들고 있으면서 눈이 파랗게 칠해져있는게 특이하다. 파란눈은 불교미술에서 나찰의 특징이다.
하지만 최근 연구결과(링크)에 따르면, 추녀를 지지하기 위한 야차상으로 다른 절에서도 유사한 형태가 보이는 조각상이라고 한다.
사찰이기는 하지만 문화재 보호법에 따라 현재 유료입장을 받고 있다.

대웅전 - 보물 178호

병인양요 참전병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 불단으로, 1621년에 재건된 건물로 다포계의 단층 팔작지붕 건물이며 석가여래삼존불을 모시고 있다

철종 - 보물 393호

보물로 지정된 중국에서 가져 온 철로 된 종으로 형태가 장중하고 조각이 웅경하며 소리가 청아하며 전체적인 형태에서 중국 종의 특징이 살아있다.

대웅전 나부상

벌거벗은 여인을 묘사하고 있어, 대웅전 중수를 맡은 도편수가 달아난 여인에 대한 배반감으로 조각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그러나 그 목각상이 원숭이라는 주장도 있다.